오래 전 친구
겨울바람이 골목으로 몰려오자 낙엽들은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 나갑니다. 희철이도 지난 겨울 때 입었던 외투를 꺼내 입고 학교엘 갔습니다. 겨울은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실 때처럼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머리를 숙이고 외투 깃을 단단히 올려야 했습니다. 지퍼를 맨 위까지 올리자 추위에 새파래진 코가 지퍼 끝자락에 걸렸습니다. 외투 속에서는 지난 겨우내 옷자락에 숨어 있던 엄마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습니다. 지난 겨울, 엄마는 아파서 하루종일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희철이가 학교 갈 때면 '겨울에는 엄마의 사랑이 들어가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이여' 하면서 힘들게 일어나 희철이의 외투를 입혀 주셨습니다. 희철이는 엄마 향기가 바깥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몄습니다.
희철이는 골목골목 구비구비 돌며 집과의 숨바꼭질을 시작했습니다. 집이 아무리 미로처럼 숨어 있어도 희철이에게는 숨은그림찾기만큼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희철이는 숨은그림찾기를 하면 언제나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그림을 금방 찾아 버리곤 했습니다. 희철이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막노동 일을 하게 되면서 이 곳 산등성이로 이사를 왔습니다. 여러 사람이 세수를 해야 했지만 자그마한 마당도 있고, 누워서 하늘을 볼 수 있는 마루도 있어서 희철이는 어느새 새 집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희철이를 기쁘게 한 건 엄마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은 골방이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웅크리고 누워야 할 정도로 좁은 방이었지만 거기에다 엄마 사진도 보관하고 엄마가 사 준 동화책들을 보관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희철이는 날마다 그 방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가 사 준 책을 읽다 잠이 들곤 하였습니다.
오늘은 할머니가 오시는 날입니다. 엄마가 올 봄에 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할머니가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집안 청소도 해 주시고 반찬도 만들어 주시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는데 어떨 때는 할머니 동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있었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희철이가?"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희철이보다 먼저 알아차립니다.
"예. 할머니.제가 마중 나가려고 했는데 벌써 오셨네요."
"귀염둥이 보려고 내 퍼뜩 왔다 아이가."
할머니가 희철이보다 더 반가워합니다.
"할머니, 재밌는 얘기 해 주세요"
희철이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기가 무섭게 할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습니다.
"그라제. 니 아부지 올 때까지 하나만 해 주꼬마."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는 희철이가 싫지 않은 모양입니다.
"음, 무슨 야그를 할까. 그래, 할매 사는 동네, 희동이 이야기를 해 줄꼬마. 나이도 우리 희철이랑 비슷할끼구마. 초등핵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아마 그럴끼라."
"어, 이름이 나랑 비슷하네? 3학년이면 좋을 텐데. 나랑 친구할 수도 있고"
"그라제? 할매 사는 집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까만 칠을 한 대문이 나오는데 희동이가 거기 산다 아이가. 지난 해 생일 때 지 엄마랑 장에 가서 토끼 두 마리를 사 왔제. 지 엄마가 생일선물로 희동이한테 사 준기라."
"희동이는 좋았겠다. 엄마가 있으니까 생일선물도 받고."
희철이는 올 봄 생일 때는 엄마 없이 아버지와 둘이서만 보냈습니다. 케잌 살 돈이 없어 초코파이로 대신한 건 괜찮았는데, 아빠랑 둘이서만 보낸 게 너무 서글펐던 기억이 났습니다.
"근데 희동이는 엄마랑 같이 안 살았는기라. 옛날에 안 그런 집이 없었겠지만 희동이네는 너무가난해서 친척 집에 희동이를 맡겨 놓았었제. 지 엄마는 한 달에 한두 번 희동이한테 와서 먹을 거도 사 주고 공부도 봐 주고 그라고 올라갔는기라."
할머니의 목소리는 가느다란 빗줄기처럼 흔들거렸습니다.
"니는 그래도 엄마하고 같이 안 살았나. 희동이는 어릴 때부터 엄마 보고잡다고 맨날 질질 우는 울보였다 아이가. 그란데 엄마한테 토끼를 생일선물로 받았으니까 월매나 토끼한테 사랑을 쏟았겠노? 날마다 뒷동산에서 토끼풀을 뜯어다 토끼한테 맥여주고 보살폈지라. 하루는 엄마가 내려와서 집 근처에 있던 밭 한 귀퉁이에다 토끼가 좋아하는 당근하고 상추, 배추를 심었제. 그라고는 그걸 토끼에게 맥있는기라. 토끼는 무럭무럭 토실토실하게 잘 자랐제. 그란데 지난 해 겨울부터 희동이 엄마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 울 엄마 아플 때랑 비슷하네?"
"그라제. 니 엄마랑 비슷할 때 아팠다 아이가. 갸 엄마는 많이 아파서 희동이한테 자주 내려가지도 못했제. 희동이는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는기라.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더 열심히 토끼를 보살핐제. 엄마가 나으면 통통한 토끼를 보여 줄끼라꼬 얼매나 열심히 돌봤는지 모린다. 그란데……"
할머니가 갑자기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희철이는 눈을 살풋 감은 채 할머니 얘기를 듣고 있다 할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이 나는지 얼른 소매로 눈 주위를 훔쳤습니다.
"그란데 그만 희동이 엄마가 병을 못 이기고 죽었다 아이가. 하늘도 무심하제. 우째 그리 급하게 데려갔을꼬."
희철이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엄마 생각이 예상치 못했던 파도처럼 와락 밀려왔습니다.
"희철이 니 엄마도 봄에 돌아가셨제. 지금쯤은 하늘나라에서 희철이가 아빠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나 보고 계실끼다."
할머니는 희동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할머니. 정말로 엄마가 저를 보고 계실까요?"
"하모. 이따 밤이 되면 니 엄마별 한번 찾아보거라."
할머니는 소매자락으로 코를 핑- 하고 소리내어 풀었습니다. 희철이도 덩달아 눈물과 뒤범벅이 된 코를 힝- 하고 풀었습니다.
"할머니. 그래서 희동이는 어떻게 됐어요?"
"그라제. 희동이 야그 하다 말았제? 그란데 참으로 이상해야? 희동이가 말이다. 지 엄마가 죽고 나서는 일절 말을 안 하는기라. 입에 자물쇠를 채워 놓았는지 딱 말문을 닫아뿟는기라. 그란데 더 이상한 거는 사람하고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면서 토끼하고는 맨날 야그를 하제.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희동이보고 미칬다 안 카나."
희동이가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자 희철이 가슴이 못에 찔린 것처럼 찡하게 아파 왔습니다.
"할머니, 사실은요. 저도 그랬어요.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한 동안은 아무하고도 얘기하기 싫었어요.그냥 엄마 따라 나도 죽고만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요.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길인데 이상하게 길 가에 핀 꽃한테 말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꽃한테 말을 걸기도 하고 어떨 땐 숲 속에 숨어 있던 다람쥐한테 불쑥 말을 걸기도 했고요. 아직도 집에 오는 길이면 길 가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꽃이랑 나무들하고 얘기를 해요. 희동이도 아마 그런 마음일 거예요."
"니도 그랬구만. 희동이처럼 니도 그랬구마. 이 어린 것이……"
할머니는 희철이 머리를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할머니가 한참을 그러고 있자 희철이는 희동이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할머니. 희동이는 그래서 아직까지 토끼하고만 이야기 해요?"
"그라제. 희동이 야그 하다, 내 정신 좀 보그라이. 그란데 희동이가 말이다. 토끼랑 얘기할 생각만 했제, 지 엄마가 맹글어 놓은 밭은 돌 볼 생각을 안 했는기라. 엄마가 없어서 힘이 안 나기도 했겠제. 밭에 심겨져 있던 배추랑 상추를 다 뽑아 토끼 멕이고 나니까 이제 토끼한테 줄 끼 없어지뿌따 아이가."
희철이는 이제 희동이가 할머니 이야기 속의 남 모르는 주인공 같지가 않아졌습니다. 누워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기에는 마음이 안타까워져서 할머니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희철이의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 젊은 것이 어린 것들을 두고 갔어야. 이 어린 것들이 혼자 어찌 살라고"
"할머니 할머니. 희동이가 토끼에게 먹이를 계속 줬어요? 토끼풀이라도 뜯어서 줬대요?"
희철이는 희동이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얼른 할머니 동네엘 내려가서 희동이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라제. 토끼한테 먹을 게 없어지자 희동이는 토끼한테 한 동안 아무 것도 안 줬지라. 겨울이기도 했고 그 동안 주위 토끼풀을 다 뜯어줘서 토끼풀은 찾아볼 수도 없었제. 그래서 며칠 사이에 토끼들은 살이 빠져 홀쭉해졌는기라. 그란데 희동이 옆집에 사는 김씨 아저씨라고, 그 아저씨가 희동이를 많이 귀여워했제. 희동이한테 과자도 주고 서울 야그도 들려주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그랬는기라. 희동이 토끼가 몇 끼를 굶었다는 말을 듣고는 김씨 아저씨가 읍내 시장에 나가서 배추를 몇 개 사 왔다 아이가."
"와, 참 좋은 아저씨네요.나도 그런 아저씨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라제. 그란데 말이다. 토끼 두 마리가 시장에서 사 온 배추를 먹고는 이틀을 못 넘기고 죽어삣는기라. 눈이 빨개지고 피똥을 싸고 죽었다 아이가."
희철이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갑자기 귀가 멍멍해졌습니다. 희동이의 토끼가 죽다니, 그건 안 될 말이었습니다.
"그 날 희동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온 동네가 밤새도록 희동이 울음소리 땜씨 잠을 못 잤지라. 그래도 암 말도 못했제. 지 엄마도 죽고 토끼까정 죽어 버렸응께……."
희철이는 달려가서 희동이의 목을 껴안고 같이 울어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라데. 농약 때문에 죽었을 끼라고. 요새 비닐하우스 배추들은 농약을 많이 뿌려서 벌레 묵은 것도 없고 색깔도 곱다고."
"농약 때문이라고요?"
"그라제. 농약이 그리 무서분기라. 우리 몸 속에도 얼매나 많은 농약이 쌓여 있는지 모를끼라. 토끼 죽는 거 봐라. 농약이 보통 무서븐기 아이데이."
"그래서 희동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라제. 김씨 아저씨가 미안하다고 희동이한테 토끼 두 마리를 사다 줬는기라. 첨에는 김씨 아저씨가 밉다고 밥도 안 먹고 얼굴도 안 마주치더니만 지금은 밭도 열심히 일구고 토끼한테 잘 해주고 있다 아이가."
"야, 다행이다. 할머니. 그럼 이번 방학 때 할머니 고향에 가면 희동이를 만날 수 있겠네요?"
"그라제. 이번 방학 때 할머니 집으로 내려 오이라. 그라문 희동이랑 날마다 같이 지낼 수 있을끼라. 혹시 모르제. 니하고 칭구 하다보면 희동이가 말문을 열지 우찌 알겠노."
희철이는 할머니가 집에 오신 아빠랑 이야기 하는 사이에 혼자 골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사 준 동화책을 한 권 뽑아서 가슴 깊이 엄마의 향기를 맡아 보았습니다. 희철이는 책을 읽다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반짝거리던 큰 별 하나가 어느새 엄마로 바뀌었습니다. 그 옆에 있던 별 하나도 스르르 움직이더니 희동이로 바뀌었습니다. 희동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두 손에 토끼 두 마리를 안고 있었으니까요. 엄마는 두 팔을 가득 벌렸습니다. 희동이와 희철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엄마도 두 팔로 희동이와 희철이를 껴 안았습니다. 희철이는 꿈 속에서 희동이를 처음 만났지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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